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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인문경영연구소"에 대한 검색결과699건
  • [비공개] 지구상 발견, 마침내 조선에 이르다

    지구상 발견, 마침내 조선에 이르다 조엄의 통신사 일행은 1763년 8월 3일 서울을 출발하여 육로로 8월 23일 부산에 도착했다. 부산포를 출발한 133일 째인 1764년 2월 16일에 일본 에도에 도착하는 긴 여정이었다. 그 첫 일본 기항지가 대마도 북단 사스우라였다. 앞서 서술한 바와 같이 이곳에서 고구마를 처음으로 본 조엄은 이 뛰어난 식량대용 작물을 부산포로 가는 대마도 비선(飛船)편에 즉각 보낸다. 해를 넘기면 재배를 기약할 수 없다는 절박함과 재배시간을 벌기 위해서였다. 이후 고구마는 조선 전래 직후부터 조정과 민간의 관심을 폭발적으로 모으며, 종자 보급과 함께 재배법이 상세히 소개된다. 이로 인해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는 식물’이라는 최고의 구황작물로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뒤이어 많은 사람들이 재배・증식・가공법 등을 개발..
    인문경영연구소|2012-09-11 10:59 am|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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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공개] 고구마, 사고의 전환이 가져온 위대한 발견

    고구마, 사고의 전환이 가져온 위대한 발견 인생에선 때로 기대하지 않았던 일들이 벌어지곤 한다. 콜럼버스가 인도로 가는 항로를 찾기 위해 항해에 나섰다가 신대륙을 발견했듯, 우연한 기회에 찾아지는 행운을 흔히 ‘영민한 발견(serendipity)’이라고 부른다. 부산을 떠난 조엄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놀랍게도 난생 처음 접하는 새로운 발견으로의 초대였다. 조엄 일행은 1763년 10월 6일 대마도에 도착해 5일 동안 사스우라에 머물게 된다. 이 때 조엄은 조선의 먹거리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최대의 구원투수를 만나게 된다. 바로 고구마였다. 고구마를 처음 본 순간, 조엄은 그것이 구황작물로 이용후생에 가치가 높다는 점을 인지했다. 그는 즉시 고구마의 생태・맛・재배법・저장법 등을 상세히 탐문하여 기록하고, 고구마 종자를 사서 재배설명서..
    인문경영연구소|2012-09-10 01:27 pm|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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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공개] 조엄, 일본에 가다

    조엄, 일본에 가다 조엄이 대일통신사로 파견될 즈음 조선은 수년간 흉년으로 기근에 시달리고 있었다. 백성들의 삶은 말이 아니었고, 국가적으로도 재정 및 경제상 어려움이 컸다. 특히 1757년(영조 33)에는 서울에만 굶주려 죽는 자가 8,700명에 달했고, 자작농들은 당장 허기를 면하기 위해 지주들에게 토지를 넘기고 소작농으로 전락했다. 1763년 3월에는 곡창지대인 호남에서도 48만 명의 기민이 발생했다. 또 아사자가 450여 명이나 되었다. 국가적 위기 상황이었다. 이에 국왕 영조는 기민들을 불러 직접 처참한 참상을 듣고, 자신의 반찬을 줄이도록 명했다. 또한 소의 도살을 엄금하였으며 궁중에서 사용하는 연여(輦與) 장식에 금 대신 주석을 사용하라며, 사치 풍조를 금하는 금사령(禁奢令)을 공포하였다. 동시에 전국에 조세를 탕감하는 조치를 취하..
    인문경영연구소|2012-09-04 05:47 pm|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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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공개] 한산대첩: 개별 승리보다는 전체 판세를 뒤집어라

    한산대첩: 개별 승리보다는 전체 판세를 뒤집어라 한산대첩은 임진년 7월 6일부터 13일까지 8일간에 걸쳐 견내량 및 안골포에서 적선 89척을 격침시키고, 12척을 나포한 쌍방 간 교전이 치열했던 대전이다. 견내량 해전은 적장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의 주력함대 73척과 이순신 함대 56척간 결전이었다. 견내량은 지형이 좁고, 암초가 많아 판옥선과 같은 큰 배가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없다. 지형으로만 놓고 본다면 당연히 조선수군에게 불리했다. 불리한 지형을 장군은 혁신적 전법으로 돌파한다. 나라의 운명을 건 대전투에서 승리하기 위해 저 유명한 혁신전법인 ‘학익진법(鶴翼陣法)’이 전면 등장하는 것이다. 원래 학익진은 육전에서 발전된 것이다. 그러던 것이 해전에 맞게 일부 변용되어 이용되어 왔다. 육지에서 바다로 넘어오며 학익진..
    인문경영연구소|2012-09-04 10:03 am|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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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공개] 태풍 위기관리 능력

    제12법칙: ‘언제나 똑같은 결과를 가져오는 복제’의 법칙 -해마다 되풀이 되는 같은 위험을 넘기고도 다음 해에도 똑같은 반응을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름이면 한반도에 몰아치는 태풍과 그 피해는 오랫동안 겪어온 재난의 유형이며, 이에 대한 대책은 해마다 제기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비슷한 결과가 나타난다면, 그것은 다분히 인재에 적잖은 원인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태풍 ‘루사’와 ‘매미’는 이에 대한 적절한 예에 해당될 것이다. 한반도는 지정학적으로 태풍의 영향권 내에 있다. 어쩌다 운이 좋아 피해 간다고 해도 그것은 요행수일 뿐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환경은 바꿀 수 있는 변수가 아닌, 상수에 해당된다. 태풍은 매년 주기적으로 발생하는 자연현상이지만, 우리에게는 재난으로 다가온다. 피해액도 막심하다. 통계..
    인문경영연구소|2012-08-27 05:26 pm|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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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공개] 일본의 군국주의 준비

    일본의 군국주의 준비 일본은 선진 자본주의 열강이 제국주의로 이행하는 전야에 해당하는 1853년에서 1877년 사이 급격한 국가적 변화를 초래한다. 1853년 미국의 동인도 함대의 사령관인 M.C.페리 제독이 개국(開國)을 요구하는 국서(國書)를 가지고 일본에 들어오자 이때부터 ‘유신(維新)’이 싹트기 시작한다. 일본은 1854년 미·일 화친조약을 체결한데 이어 1858년 미국을 비롯해 영국·러시아·네덜란드·프랑스와 통상조약을 체결하게 된다. 하지만 이 조약은 천황의 칙허 없이 막부가 독단적으로 처리한 것으로 이후 반(反)막부 세력이 일어나 막부와 대립하는 격동 국면이 벌어진다. 1866년 막부가 패배하자, 이듬해인 1867년 일본에서는 ‘대정봉환(大政奉還, 왕정복고)’이 일어나며 명치(明治)정부가 들어서게 된다. 명치정부는 학제·징병령·지조개..
    인문경영연구소|2012-08-23 04:00 pm|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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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공개] 일본의 한반도 재침론

    일본의 한반도 재침론 일본이 역사상 국가적 차원에서 주도한 공식적이며 대대적인 한반도 침략 행위를 분석해보면 일정한 패턴이 있다. 국가 차원의 대대적 침략 준비 행위를 포함해 일본에 의한 주요 침략 행위 및 그에 맞선 우리 측의 대응을 살펴보면 대체로 다음과 같은 시점과 시차를 보인다. [왜(倭)의 국가적 침략 시점과 시차표] 침구시점 (침구대응시점) ㉠ 295년- 왜구 침구에 대한 신라의 왜구 근거지 정벌계획(실행안됨) 침구시차 (96년) ㉡ 391년- 왜와 백제군의 고구려 침공(실행) (6년) ㉢ 397년- 백제와 화통한 왜의 지원군이 신라국경 침범(실행) (10년) ㉣ 407년- 왜구 침구에 대한 신라의 왜구 근거지 정벌계획(실행안됨) (256년) ㉤ 663년- 왜 백제구원군의 백촌강 전투(실행) (68년) ㉥ 731년- 왜의 신라침공(300척의 전함을 동원해 신라를 침공했으..
    인문경영연구소|2012-08-16 10:20 am|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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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공개] 일본 재침의 현재성: ‘강화도 조약과 ‘한일합방’

    일본 재침의 현재성: ‘강화도 조약과 ‘한일합방’ 1598년 임진왜란 실질 전쟁이 끝나고, 1607년 조․일 간 국교 재개가 이루어진 다음 269(278)년 후인 1875년(고종 12년) 일본은 운양호(雲揚號)사건을 일으킨다. 그 결과 일본은 이듬해 조선 정부에 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을 체결하도록 강요한다. 이는 근대 일본이 조선 재침을 목적으로 교묘하게 위장한 침략 행위였다. 이때 일본은 부산에서 영흥만(永興灣)에 이르는 동해안 일대의 해로를 측량하면서 함포(艦砲)시위를 벌였다. 또한 운양호를 강화도 앞바다에 재차 출동시켜 초지진(草芝鎭)을 지키던 수비병들이 발포하도록 유도한 다음 이를 빌미로 침략 행위를 자행했다. 일본 침략의 첫머리는 이렇듯 작은 분란을 통해 우리의 대응을 유도한 다음 자신이 피해자인 양 위장하여 그에 대한 보복적 성격..
    인문경영연구소|2012-08-13 04:42 pm|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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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공개] 2011년 한국 교과서 사건의 본질

    2011년 한국 교과서 사건의 본질 여기서 잠시 ‘임진왜란’과 관련되어 2000년대 첫 10년을 갓 넘긴 시점에서 한국 내에서 일고 있는 문제를 살펴보기로 하자. 한․일간 역사적 사건에 대한 명칭이나 용어는 국가의 위상과 역사적 사건에 대한 의미의 총체성을 담고 있다. 그런데 이 같은 명칭(용어)문제를 다시 생각해 보게 만드는 ‘사건’이 2011년 대한민국에서 진행되고 있다. 즉 2012년부터 고등학교 교과서 ‘동아시아사’ 과목 2종(교학사, 천재교육 출판사 간행 예정)에서 ‘임진왜란’을 ‘임진전쟁’으로 ‘병자호란’·‘정묘호란’을 ‘병자전쟁’·‘정묘전쟁’으로 바꿔 기술해 가르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는 점이다. 이 같은 명칭 변경에 대해 학계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임진왜란’ 명칭 변경에 대한 한국 학계 일각의 변(辯)] ● 조..
    인문경영연구소|2012-08-13 04:37 pm|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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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공개] 지속가능 전쟁의 결정판: ‘임진왜란 7년 전쟁’

    지속가능 전쟁의 결정판: ‘임진왜란 7년 전쟁’ 1275년과 1281년의 ‘대(對)고려 침공 계획’이 무산되고 난지 311(317)년이 지난 1592년, 일본은 마침내 한반도에 대한 대대적 침략 전쟁을 개시한다. 이번에는 불발이 아니라 실질전쟁이자, 대대적인 국가 전쟁으로 전개되었다는 점에서 전쟁의 참상은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다. 이미 전전(戰前) 몇 년간 일본은 전쟁을 치밀하게 준비했고, 전란 중 4년의 강화(講和) 기간을 포함하여 전쟁 상황이 7년간 지속되었다는 점에서 초(超)장기전 양상이었다. 우리가 부르는 임진왜란 7년 전쟁이 이것이다. 임진왜란은 앞서 계획했던 두 번의 대대적인 정벌 계획처럼 일본이 국가적 차원에서 계획하고 추진하였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으나, 오랜 왜의 한반도 ‘정토(征討) 계획’이 구체화된 것이라는 점에서 한․일..
    인문경영연구소|2012-08-13 04:34 pm|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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